체력 고갈 왕조의 말로
한 왕조가 천 년을 지속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하지만 천 년 왕조의 끝은 대개 조용하지 않다. 고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유교 이상에 불타던 신진사대부가 조선을 세운 것이 단순한 ‘쿠데타’였다고 보기엔, 고려 자체가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 조선을 막지 못한 고려의 말기, 그 허약한 현실을 들여다보자.
몽골과의 전쟁, 그리고 그 후유증
고려는 13세기 무려 30년간 몽골과 싸웠다. 끝내 항복하며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었지만, 대가도 컸다. 왕실은 원의 사위국으로 살아남았지만, 민중은 피폐했고, 군대는 탈진했고, 귀족 사회는 더 이상 단결되지 못했다. 겉으론 유지된 체제였지만 속은 곪아가고 있었다.
특히 몽골과의 전쟁은 국방 체계의 전면 붕괴를 불러왔다. 고려 군대는 기동력과 조직력이 약화됐고, 전국은 왜구의 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이 틈을 타 부상한 인물이 바로 최영, 이성계 같은 무장이었다. 이들은 외침에 대응하며 백성의 신뢰를 얻었고, 점차 정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개혁은커녕 기득권 수성에 급급했던 구체제
고려 말기, 권문세족은 나라를 살릴 생각보다 자신들의 특권 유지에만 골몰했다. 토지는 이미 일부 문벌 귀족에게 집중되었고, 백성은 조세 부담에 시달리며 떠돌이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은 원 간섭기 속에서 성장하며 개혁의지를 품은 젊은 엘리트들이었고,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기반으로 기득권 체제를 비판했다. 하지만 고려는 이들의 목소리를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기득권은 눈앞의 이익을 놓지 않았고, 결국 내부 모순은 임계점을 넘어서고 말았다.
군사력조차 장악하지 못한 고려 왕실
고려는 형식적으로 왕권이 유지된 국가였지만, 실제 권력은 무신정권 이후 다양한 세력에게 분산돼 있었다. 특히 이성계는 명나라와의 외교와 군사 문제를 틀어쥐며 실질적인 힘을 키워갔다.
1388년, 요동 정벌을 명분으로 위화도에 이른 이성계는 전격적으로 회군한다. 이를 계기로 최영과의 갈등은 폭발하고, 사실상 고려 조정은 무력에 의해 장악된다. 왕실은 무력했고, 군사적 실권을 쥔 이는 이미 다른 왕조를 꿈꾸고 있었다.
새로운 이념 vs 낡은 체제
조선을 세운 것은 단지 무력의 승리가 아니라, 새로운 사상의 승리이기도 했다. 고려가 불교를 국교로 삼고 귀족 중심의 문화를 유지하는 사이, 성리학은 더 합리적이고 조직적인 사회 운영 방식을 제시했다. 이념적 정당성마저 잃은 고려는 점차 ‘시대에 뒤처진 왕조’로 인식됐다.
이성계는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욕망보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는 신진 관료들의 압박 속에서 움직였다. 정몽주 같은 고려 충신도 있었지만, 변화의 물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고려는 진 것이 아니라, 버티지 못한 것이다
고려가 조선에 ‘패배’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외세, 내란, 기득권의 부패, 사상의 전환… 모든 조건이 고려에게 불리했다. 말하자면, 고려는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링 위에 올라간 선수였다. 싸우기도 전에 기우뚱했고, 누군가가 옆에서 새로운 링을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결론적으로, 고려는 단순히 약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다. 너무 오래 싸워왔고, 너무 많은 모순을 안고 있었으며, 변화에 대응할 정치적·이념적 체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조선을 막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고려의 멸망은 한 왕조의 몰락이자, 시대정신의 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