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남긴 기억, 문서 밖의 진짜 역사
공식 기록은 언제나 단정하다. 연대가 정확하고, 사건이 명확하다. 그러나 그렇게 정제된 기록 뒤에는 수많은 ‘말’들이 있다. 공문서에도, 신문에도 남지 못했지만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들.
구술사(口述史)는 그 잊힌 기억을 붙잡는 작업이다.
‘기록 밖의 사람들’을 발굴하는 방법
구술사는 ‘말로 쓴 역사’다. 과거를 직접 겪은 이들의 육성을 바탕으로, 문서화되지 않은 경험을 기록한다. 구술 인터뷰는 대부분 일대일로 진행되며, 음성 자료를 텍스트로 전사하고 분석해 역사적 맥락 안에 배치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나 언론의 시선이 미치지 않았던 개인의 경험이 드러난다. 가령 민주화운동 당시 시위 현장에 있었던 무명의 노동자, 6·25 전쟁을 피난민으로 겪은 어린 소녀, 혹은 산업화 시대 서울 외곽에서 자급자족했던 농민의 삶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 현대사의 빈틈을 메우는 구술 증언
한국에서도 1990년대부터 학계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구술사 프로젝트가 본격화됐다.
대표적인 예는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한국 근현대사 구술자료총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구술사 증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민주인권 구술사> 등이 있다.
이들 자료는 기존 공식 기록이 담지 못한 '사람의 삶'을 채워 넣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1980년 광주에 있던 청소노동자의 증언은 5·18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준다. 국가 폭력의 당사자뿐 아니라, 그 주변의 ‘지켜본 사람들’의 기억이 더해질 때, 역사적 사건의 밀도는 비로소 완성된다.
공식 기록과의 충돌, 그리고 해석의 책임
구술사는 ‘진실’일까? 이에 대해 학계는 조심스럽다.
구술 증언은 어디까지나 ‘기억’에 의존한다. 수십 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데는 개인차가 크고, 감정의 개입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공식 기록 또한 완전하지 않다는 점에서, 구술 증언은 역사적 사실을 보완하는 중요한 퍼즐 조각으로 평가된다.
문제는 해석이다.
구술자는 자신이 본 것만 이야기한다. 이를 어떤 맥락에 위치시키고,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자료로 삼을지는 연구자와 기록자의 몫이다. 이 때문에 구술사 작업은 단순 채록을 넘어 해석과 윤리의 영역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말로 남긴 역사, 왜 지금 중요한가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사회문제 역시 언젠가는 ‘역사’가 된다. 코로나19, 기후위기, 세대 갈등, 플랫폼 노동 등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시대의 단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공식 기록만으로는 이들의 현실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
실직한 프리랜서의 체험, 고시원에 사는 청년의 하루, 이주노동자의 노동 환경처럼 국가나 언론이 포착하지 못하는 생생한 삶의 결은 구술이라는 방식으로만 포착 가능하다.
이 때문에 최근 국내에서도 ‘생활 구술사’, ‘디지털 구술 아카이빙’ 등 새로운 시도들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목소리로 남기는 기록이 단순한 기억을 넘어 사회의 풍경이자 증언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는 누구의 이야기인가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저 잊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다만 기록될 기회를 갖지 못했을 뿐이다.
구술사는 이들에게 말을 걸고, 그 말을 역사 속에 새긴다.
종이에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인생을 복원하고, 그 존재를 증명하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가 구술사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