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의 문턱 앞에서 멈춘 빛의 시대
서울 종로에 처음으로 불이 켜진 것은 1887년, 고종의 경복궁 건청궁에서 열린 생일잔치 자리였다.
이날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전등’이 켜진 날로 기록된다. 그러나 이후 전기의 확산은 더디기만 했다.
왜 조선은 ‘전기의 시대’로 빠르게 넘어가지 못했을까?
미국에서 건너온 전기, 왕실의 상징이 되다
조선에 전기가 들어온 직접적인 계기는 미국인 에디슨이 발명한 백열전구 덕분이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고종은 미국 공사관을 통해 최신 문물을 적극 수입한다. 그중 하나가 ‘전기’였고, 건청궁과 덕수궁 등에 설치된 전등은 황제의 위신을 상징하는 도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는 왕궁 안의 이야기였다. 전기는 곧바로 백성의 일상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전등이 아닌 ‘궁전등’으로 불린 이 기술은 철저히 상징적 자산이었다.
전선보다 느린 행정, 관료 사회의 기술 불신
전기 도입 이후, 조선 정부는 본격적인 전기 인프라 확산을 계획했다. 그러나 문제는 기술에 대한 이해 부족과 관료 사회의 보수성이었다. 전깃줄 설치에 대해 “풍수에 해롭다” “음양의 기운을 혼란케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실제 1890년대 전신선을 설치하려다 지방 유생과 향촌 유지들의 반발로 중단된 사례도 있다. 전기의 개념이 생소했던 대다수의 백성은 전구의 불빛을 ‘도깨비불’이나 ‘귀신의 불’로 오해했으며, 화재 위험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일본의 전기, 조선의 전기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에 전기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였다. 1900년대 초반, 일본은 식민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전기·철도·전화 등 인프라를 급속히 구축한다. 서울에 설립된 경성전기회사는 전차 운영을 위해 전기 공급을 시작했고, 이는 서울 일부 지역의 전등 설치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인의 삶을 위한 전기가 아니었다. 전차는 일본인의 교통수단이었고, 전력은 군부대, 관청, 공장 등 일제의 통치 기반에 집중됐다. 일반 가정으로의 전력 공급은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근대화 = 전등? 조선의 복잡한 선택
근대화는 단순한 기술 도입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선이 전기의 문턱 앞에서 주저했던 이유는 기술 그 자체보다 그 기술이 가져올 사회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전기 인프라는 건축, 행정, 도시 계획, 자본 투자, 인식 전환 등 다층적인 구조 위에서 작동한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조선은, ‘빛’의 도입 앞에서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불은 켜졌지만, 시대는 어두웠다
경복궁에 처음 불이 들어온 지 10년이 채 안 돼 조선은 국권을 잃었다.아이러니하게도, 전깃불은 조선을 근대화로 이끄는 빛이 되기보다, 일제가 식민 지배를 구축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결국, 전기의 확산은 기술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누가, 왜, 어떤 의도로’ 불을 켜느냐에 따라 그 빛은 희망이 될 수도, 통제의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조선, 전기 그리고 오늘
오늘날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전기를 당연하게 누린다. 하지만 100여 년 전 조선은 불 하나 켜는 문제를 두고 수많은 갈등과 고민을 겪었다. 그 미묘한 속도는 단순한 기술 지체가 아니라, 시대와 체제, 그리고 선택의 문제였다.
조선에 전기가 늦게 들어온 이유를 묻는 질문은 곧, 한 사회가 얼마나 빠르게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