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왜 근대화에 실패했는가?”라는 질문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이 던지는 물음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 속에는 암묵적인 전제가 담겨 있습니다. 근대화란 곧 ‘필연적인 발전’이며, ‘서구적 기술의 수용’은 곧 진보라는 생각 말입니다. 하지만 조선 말기 기술 도입의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이면은 훨씬 복잡합니다. 조선이 수용한 근대 기술은 단지 기술이 아니라, 권력과 제도, 외세와 민중의 삶까지 뒤흔든 거대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 조선이 서양기술을 받아들인 시기
조선이 처음 서양 기술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시기는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1883년 설치된 기기국입니다. 이곳에서는 서양식 무기와 군수물자를 제조했으며, 청나라의 기술자와 미국식 장비가 투입됐습니다. 1885년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 문을 열었고, 1899년에는 경인선 철도가 개통됩니다. 그야말로 조선에도 ‘기술의 물결’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술 도입은 조선 내부에서 ‘자발적 진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은 외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통해 외세가 먼저 발을 들여놓았고, 정부는 뒤늦게 이를 수용하거나 통제하려 했습니다. 문제는 조선이 이런 기술을 통해 진정한 내적 역량을 키웠는가, 아니면 표면적인 ‘근대의 모양’만 빌려왔는가 하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기’입니다. 고종은 미국 에디슨의 발명 소식을 접하고, 경복궁 건청궁에 전등을 설치합니다. 당시 이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술의 상징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기는 일반 백성들의 일상까지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권력을 상징하는 장소에만 빛을 밝힌 이 기술은, 조선 사회에서 단절된 위계의 구조를 드러냈습니다.
2. 근대화의 상징 경인선
철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899년 개통된 경인선은 ‘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그 운영권은 일본 자본이 장악했고, 철도 부설권 역시 외국에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즉, 조선의 기술 도입은 주도권 없이 진행된 외형적 근대화였고, 이는 곧 주권의 약화를 동반한 ‘타율적 발전’이었습니다.
또한, 조선 내부에서도 기술에 대한 인식은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일부 개화파 인사들은 신문물을 ‘구국의 도구’로 여겼지만, 다수의 유생과 민중은 이를 혼란의 시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전신줄이 마을을 가로지르자 “지신(地神)의 기운이 끊긴다”며 반발이 일었고, 증기기관은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물건’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기술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세계관의 전환을 요구하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3. 조선이 근대기술을 맞이한 이유
이렇듯 조선이 맞이한 근대 기술은 단지 편리함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누가 이 변화를 주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조선은 기술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 전에, 이미 외세에 의해 제도와 권력이 잠식되고 있었습니다. 전등이 켜지기도 전에, 조선의 주권은 꺼져가고 있던 셈입니다.
근대화는 단지 철도와 전화, 병원이 도입되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가 기술을 통제하고, 누구를 위해 쓰이며, 어떤 제도로 뒷받침되는가에 따라 그 빛과 그림자가 갈리는 과정입니다. 조선 말기 기술 도입의 이면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근대화는 누구의 것이었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기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