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직은 곧 출세의 길?… 조선 지식인의 ‘관직 거부’ 이면
오늘날 직장인들에게 ‘퇴사’는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퇴사 욕구는 현대만의 현상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도 ‘관직을 벗어나고 싶다’고 토로한 지식인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벼슬을 거절하거나 중도에 관직을 그만두고, 스스로 자연이나 학문 속으로 들어가기를 택했다.
조선시대 ‘퇴사’는 지금처럼 단순히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의 태도와 철학에 대한 결정이었다.
출세와 은둔 사이, 고민했던 선비들
조선은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과거 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를 운영했다.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명예이자 집안의 위상을 높이는 수단이었지만, 모든 지식인이 이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조광조, 김정희(추사), 정약용, 이퇴계 등이 있다. 이들은 때로는 스스로 벼슬을 사양했고, 때로는 유배 혹은 정치적 갈등으로 자발적 ‘퇴사’를 택했다.
사림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조광조는 개혁정치의 실패 후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지만, 유배 중에도 “나는 벼슬보다 도(道)를 따르고 싶었다”는 뜻을 남겼다.
정약용 역시 관직에서 쫓겨난 뒤 고향에서 학문과 저술에 몰두하며 “오히려 자유를 얻었다”고 기록했다.
조선판 사표: ‘상소’와 ‘자발적 낙향’
조선시대 관료들이 ‘사직서’를 제출하는 방식은 주로 상소문 또는 사직계(辭職啓)였다. 관직을 사양하거나 물러나기를 요청하는 이 문서들은 대개 체면과 논리를 겸비해야 했다. 단순히 ‘일이 힘들다’는 이유보다는 정치적 신념, 개인의 수양, 혹은 권력에 대한 회의를 내세웠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의 퇴사는 회피가 아니라 가치 판단의 결과였다. 실제로 ‘자발적 낙향’을 선택한 인물 중 상당수는 퇴직 이후 오히려 더 큰 학문적·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조선 중기 문인 김시습은 스무 살에 과거에 급제했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분노해 벼슬을 거부하고 전국을 유랑했다. 그는 “관직은 권력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썼다.
퇴사의 이유는 ‘정치’였다
이들이 관직을 거절하거나 내려놓은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정치적 피로와 환멸이 있었다. 사화(士禍)와 붕당정치 속에서 선비들은 자신의 뜻이 왜곡되거나 배척당하는 현실을 자주 경험했다. 이 때문에 현실 정치보다는 학문적 성찰이나 도덕적 삶을 더 가치 있게 여겼다.
조선후기 실학자 박지원도 “정치를 바꾸는 것보다 나를 지키는 것이 먼저”라고 했으며, 박제가는 “벼슬보다 글이 더 길게 남는다”고 기록했다.
오늘날과 닮은 점은?
조선의 ‘퇴사’와 현대의 퇴사는 동기와 맥락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자기 삶의 방식’을 고민한 결과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지금처럼 조직 내 갈등이나 번아웃이 원인이기보다, 조선의 선비들은 스스로의 철학과 삶의 목적에 따라 관직을 떠났다. 그리고 그 선택은 ‘실패’가 아닌 또 다른 경로의 시작이었다.
한양대 국사학과 윤종혁 교수는 “조선시대에도 자기 삶의 주체가 되려는 지식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퇴사’는 오히려 시대를 앞서간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관직을 떠나 얻은 것들
관직에서 물러난 이들은 자연 속에서 글을 쓰고, 후학을 양성하며, 삶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 결과, 정치인이 아닌 철학자, 교육자, 예술가로서 후대에 더 길이 남았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퇴사하고 싶다”고 말하는 시대, 조선의 선비들이 남긴 선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엇을 버려야 진짜 나를 살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