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1910년, 결국 대한제국은 일제로부터 병합당하며 공식적으로 사라졌습니다. 조선 왕조 500년의 맥을 잇던 마지막 국가, 대한제국이 그렇게 막을 내린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가 사라졌다고 해서 삶까지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궁궐 바깥, 평범한 백성들의 일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끝, 근대의 시작
조선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조선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행정적으로는 ‘조선총독부’라는 새로운 체계가 들어섰지만, 문화와 언어, 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조선의 정서가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양반과 상민, 노비라는 신분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그것이 곧바로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의 논리 아래 또 다른 형태의 차별과 억압이 새롭게 자리잡게 됩니다. 갑작스레 바뀐 권력 구조 속에서 누군가는 적응했고, 누군가는 저항했습니다.
일상의 변화, 그러나 익숙한 풍경들
경성(서울)을 중심으로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서고 전차가 다니기 시작했지만, 골목 안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익숙한 방식대로 이어졌습니다. 장날이면 어김없이 시장이 열리고, 아이들은 뒷골목에서 공기놀이를 하며 뛰놀았습니다.
조선의 전통 의복인 한복은 여전히 일상복으로 입혔고, 집에서는 밥상에 된장국과 김치가 오르내렸습니다. 물론 새로운 풍경들도 빠르게 스며들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 교육이 강제로 도입되었고, 태극기 대신 일장기가 걸렸으며, 신문과 방송을 통해 "대일본제국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반복 학습되었습니다.
무너진 왕실, 흩어진 귀족들
왕실 사람들은 대한제국의 붕괴 이후 일본 왕실의 ‘귀족’ 신분으로 흡수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예우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덕수궁에 머물던 순종, 이왕직으로 편입된 황족들은 대부분 제한된 활동만을 허락받았습니다.
한때 권세를 누렸던 구양반층 역시 급격한 몰락을 겪었습니다. 일부는 일제에 협력하며 식민지 체제에 편입되었고, 다른 이들은 생계를 위해 전통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과거 '벼슬'로 권위를 누렸던 이들이 이제는 상점 주인이나 교사, 혹은 언론인으로 거듭나야 했던 것입니다.
조용한 저항, 그리고 희망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조용히 저항했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이라는 말 속에는 단순한 슬픔 이상의 각성이 담겨 있었습니다. 신문을 통해 독립운동 소식을 몰래 전했고, 학생들은 비밀리에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민족의식은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지만, 학교에서, 교회에서, 가족 안에서 은근히 이어졌습니다.
삶은 달라졌지만,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결혼식 날이면 여전히 폐백을 올렸고, 설날이면 조상께 차례를 지냈습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머리를 손으로 넘기며 “조심해서 다녀오너라”고 당부했고, 마을 어귀의 장승은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 모든 일상은 조선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 정신과 감정은 살아 있었다는 증거였습니다.
‘끝’이 아닌, 이어짐의 기록
대한제국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끈질기게. 고종의 장례식에 수많은 백성이 몰려들었던 이유도, 단지 죽은 왕을 기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시대와 정체성에 대한 작별 인사이자, “우리는 아직 여기 있다”는 조용한 선언이었습니다.
왕이 사라진 후에도 조선은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이름을 달리한 조선, 곧 독립을 향한 마음을 간직한 조선, 그리고 지금 이 땅에 살아 숨 쉬는 우리 안의 ‘조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