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야근이네…”
현대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내뱉었을 말입니다. 하지만 혹시 알고 계셨나요? 조선시대에도 지금으로 치면 ‘야근’이라 부를 수 있는 일이 존재했다는 사실을요. 조선의 관료, 서리(書吏), 그리고 궁궐의 사람들까지. 오늘날의 직장인처럼, 때로는 밤을 새워가며 일했던 기록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해 지면 퇴근? 조선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흔히 우리는 조선시대를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쉰다’는 자연 리듬의 시대라고 상상합니다. 실제로 일반 백성들의 삶은 그랬습니다. 해가 지면 불빛도 부족했기에 대부분의 농민이나 상인들은 자연스레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일하는 관리, 특히 궁궐 안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왕의 지시에 따라 야심한 밤에도 보고서를 작성하고, 급한 상소를 검토해야 했으며, 전염병, 재해, 반란 등의 긴급 사안이 발생하면 밤새 회의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긴급 대책회의’가 밤 10시에 소집되는 셈이죠.
조선의 야근러 1호 – 사관(史官)
조선시대 ‘야근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사관입니다. 사관은 왕의 언행과 국정 운영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들은 왕이 공식적인 일정을 마칠 때까지 퇴근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왕이 잠자리에 드는 시간까지 기록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기에, 사관은 늘 준비 상태로 대기해야 했습니다.
왕이 야심한 밤에 신하를 불러 대화를 나누거나, 갑자기 정책 관련 이야기를 꺼낸다면? 사관은 촛불을 밝히고 바로 기록을 시작했습니다. 실록에는 “밤이 깊도록 기록이 계속되었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사관의 야근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궁녀와 내시도 ‘칼퇴’는 없었다
궁궐에서 일하는 궁녀와 내시들도 종종 야근을 해야 했습니다. 특히 왕과 왕비의 시중을 들던 상궁들은 밤늦게까지 대기하거나 왕실 행사 준비로 분주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전의 분부를 받아 새벽에 궁중음식을 준비하거나, 왕의 병환이 있을 경우 밤새 간호를 맡기도 했습니다.
궁중의 기록을 보면, 어느 날은 새벽 3시까지도 내관들이 왕명을 받고 약재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조선의 궁궐은 24시간 운영되는 ‘왕실 시스템’이었고,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밤은 결코 휴식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서리(書吏)의 그림자 노동
지방 관아나 한성부 등에서 실무를 맡았던 서리들은 오늘날의 공무원 실무자와도 비슷한 존재였습니다. 겉으로는 관리들이 주인공이었지만, 실제로 문서를 작성하고 보고서를 편집하며, 회계까지 책임지는 이들이 바로 서리였습니다.
이들은 종종 상관의 기한 맞추기 때문에 밤늦도록 서류를 정리하거나, 세금 장부를 다시 작성해야 했습니다. 주로 무급으로 일하던 하급 서리들은 야간에도 일하고 다음 날 다시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근로기준법 위반’이지만, 당시엔 보상도 거의 없었습니다.
야근의 흔적, 고문서 속에 남다
조선시대의 공문서나 실록을 들여다보면 ‘심야에 명을 내리다(夜下敎)’ 또는 ‘밤늦도록 아뢰다(夜深奏)’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만큼 조정은 밤에도 움직였고, 이를 위해 누군가는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궁궐에서 사용하던 기물 중에는 ‘야간용 등잔’, ‘밤참용 식기’ 등이 따로 존재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생활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실질적인 야근 환경을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야근과 오늘의 우리
조선시대의 야근은 신분과 위치에 따라 달랐습니다. 백성들은 해 지면 쉬었지만, ‘국가’를 위해 일했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거나, 왕의 뜻을 수행해야 할 때는 밤이 깊어도 촛불 아래에서 붓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야근도 누군가에겐 국가와 회사를 위한 ‘책임’일 수 있습니다. 다만 조선의 사관처럼, 기록으로 남겨지는 헌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듭니다.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야근의 역사, 그것은 단순한 업무의 연장이 아니라 시대와 권력, 그리고 책임의 무게가 만들어낸 풍경이었습니다.